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째즈음악 공연 때 찍은 거예요.
섹스폰 연주자이며 실용음악 교수님이신 이정식교수님과 이 날 연주 후에 찍었습니다.
관객의 요청에 기꺼이 응해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그날의 감동적인 섹스폰 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습니다.
한 때는 이정식의 올 댓 재즈 팬이었거든요.
임진모가 만난 사람들- 아티스트 이정식
색소폰을 연주하는 이정식은 우리 재즈음악계의 첫 손에 꼽히는 유명인이다.
그의 굵직한 이름은 그가 야밤에 진행하는 라디오 재즈 전문 프로그램 이정식의 올 댓 재즈
(93.9MHz, 연출 정우식)가 곧 10년을 맞이한다는 한 가지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유행의 동향에 있어서 부침이 심했던 국내 재즈와는 달리 그의 대중적 인지와 신뢰도는
언제나 견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CBS-FM을 통하여 애초 0시의 재즈로 송출된 이 프로그램은 새벽2시에 방송되었다가
CBS-FM을 통하여 애초 0시의 재즈로 송출된 이 프로그램은 새벽2시에 방송되었다가
다시 본령인 밤12시로 복귀했고 지금은 2시간짜리로 확대 개편되는 등 갈수록 중력이 높아지고 있다.
국내 유일의 재즈 전문 프로, 게다가 매일 방송이라는 점도 그와 프로를 아끼는 팬들은 긍지를 갖는다.
구수한 진행, 결코 어렵지 않은 해설과 선곡, 꾸준한 공개 라이브 방송 등으로 그는 이정식의 올 댓 재즈를 ''활기찬 한국 재즈 공론(公論)의 장''으로 만들어놓았다.
안정된 지명도 덕분에 심지어 이 프로는 지금까지 프로 이름을 내건 기획 앨범만도 9장을 냈다.
안정된 지명도 덕분에 심지어 이 프로는 지금까지 프로 이름을 내건 기획 앨범만도 9장을 냈다.
그는 자신의 음반 및 공연활동도 그렇지만 전파매체의 10년 지킴이라는 점도 가슴 뿌듯해 했다.
"어느새 10년이 흘렀네요. 급변하는 매체환경에서 10년이란 결코 만만한 세월은 아니지요.
프로도 자랑스럽고 제 자신도 자부심을 느낍니다. 더 노력해서 방송을 재즈 천국화(化) 하렵니다."
누구를 만나도 겸손하고 가지런한 톤의 화법 때문에도 주변인들의 호감을 사는 사람. 방송국에서 가진
누구를 만나도 겸손하고 가지런한 톤의 화법 때문에도 주변인들의 호감을 사는 사람. 방송국에서 가진
이날 인터뷰에서도 그는 단정한 차림에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로 인터뷰 자리를 따뜻하고 화사하게
만들었다. 옆 자리의 인터뷰 참관자들도 그의 이야기에 연신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반에 상경, 허름한 서울의 봉천동 살롱에서 연주를 시작한
하지만 시골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졸업반에 상경, 허름한 서울의 봉천동 살롱에서 연주를 시작한
뒷이야기를 할 때는 참 숙연했다. 그는 3시간에 걸쳐 방송10년의 보람, 어제와 오늘의 한국 재즈,
대중성과 한국성에 관한 입장 그리고 자신의 산전수전 등 음악인생과 음악관 전반을 마치 심야
방송하듯 정겹게 풀어놓았다.
방송 10년을 맞은 것을 축하 드립니다. 얼굴에서도 기분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정확히 오는 12월15일로 만 10년을 맞아요. 정말 자부심을 느낍니다. 재즈를 대중들에게 알려주는데
방송 10년을 맞은 것을 축하 드립니다. 얼굴에서도 기분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정확히 오는 12월15일로 만 10년을 맞아요. 정말 자부심을 느낍니다. 재즈를 대중들에게 알려주는데
기여했고 0시의 재즈때는 공개방송도 많이 했어요. 방송 분야에선 활동 폭이 넓지 않은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활동의 장''이 됐죠. 곽윤찬, 나윤선도 여기서 데뷔했어요. 국내 첫무대를 우리 프로에서
가졌습니다. 또 개인적으로도 공부를 많이 하게 됐어요. 아직도 재즈음악을 ''30년대와 ''40년대의 음악으로, 유물로 여기는 사람이 많죠. 매일 방송을 하다보니 새로운 정보를 먼저 알 수 있고, 신인 아티스트가 나오는 것도 자연히 알게 되잖아요. 그러면서 저도 팬들도 재즈를 항상 새로움을 갖는 음악으로 인식하게 됐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부했는지 궁금한데요.
재즈를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인식했다는 이야기인데요. 단지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해서 아티스트의 정신세계를 알게 되고, 그것을 알고 음악을 듣거나 연주를 하게 되면 맛이 달라지죠.
구체적으로 무엇을 공부했는지 궁금한데요.
재즈를 음악적으로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인식했다는 이야기인데요. 단지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해서 아티스트의 정신세계를 알게 되고, 그것을 알고 음악을 듣거나 연주를 하게 되면 맛이 달라지죠.
그러니까 더 공부하게 되더군요.
데일리 프로그램이라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그건 행운이죠. 전 이정식씨는 적어도 국내 재즈서클에서는 모든 것을 누린 인물이라고 봅니다.
그래요. 한편으로는 같은 재즈 연주를 한 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축복 받은 아티스트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데일리 프로그램이라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그건 행운이죠. 전 이정식씨는 적어도 국내 재즈서클에서는 모든 것을 누린 인물이라고 봅니다.
그래요. 한편으로는 같은 재즈 연주를 한 사람들 중에서도 유독 축복 받은 아티스트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 재즈 신에서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누렸으니까요. 나로 인해
재즈에 관심을 갖게 되고, 악기도 잡게 된 후배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왕 축복 얘기가 나온 김에 다른 축복들도 들려주시죠.
다른 재즈 뮤지션들에 비해 힘들게 고달프게 해왔다는 점이죠. 전 유학파도 아니고, 정말 유랑극단에서
이왕 축복 얘기가 나온 김에 다른 축복들도 들려주시죠.
다른 재즈 뮤지션들에 비해 힘들게 고달프게 해왔다는 점이죠. 전 유학파도 아니고, 정말 유랑극단에서
시작해서 현장의 선배님들의 음악 하는 방식, 그 ''단순 무식''의 세계를 생생하게경험했어요.
그런지는 몰라도 그 분들의 연주는 ''뚝배기'' 같은 맛이 있죠. 그것을 경험한 게 아니라 결과적으로 말하면 ''누린'' 셈입니다. 오히려 저한테는 그 고생이 보약이고 축복이었죠.
재즈 연주, 색소폰 연주의 측면에서 제도교육을 통한 연주와 현장경험의 연주는 어떤 차이를
재즈 연주, 색소폰 연주의 측면에서 제도교육을 통한 연주와 현장경험의 연주는 어떤 차이를
보입니까?
확실히 달라요. 아무래도 학교에서 배운 연주는 세련되고 예쁜 맛이 나지만 인간미는 부족하고, 현장에서 배운 연주는 투박하고 어눌하지만 정답죠. 실제로 사람을 통해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자녀가 음악 지망생이라면서요? (그에게는 25살인 딸 ''발차''와 22살 아들 ''용문''이 있다)
(먼저 자녀가 나이가 많다고 하자) 20살에 결혼했거든요. 발차는 경희대 포스트모던학과 피아노전공으로 졸업했고 현재 유학을 준비 중입니다. 아들 용문이도 같은 경희대 포스트모던학과에서 색소폰을 전공하고
확실히 달라요. 아무래도 학교에서 배운 연주는 세련되고 예쁜 맛이 나지만 인간미는 부족하고, 현장에서 배운 연주는 투박하고 어눌하지만 정답죠. 실제로 사람을 통해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자녀가 음악 지망생이라면서요? (그에게는 25살인 딸 ''발차''와 22살 아들 ''용문''이 있다)
(먼저 자녀가 나이가 많다고 하자) 20살에 결혼했거든요. 발차는 경희대 포스트모던학과 피아노전공으로 졸업했고 현재 유학을 준비 중입니다. 아들 용문이도 같은 경희대 포스트모던학과에서 색소폰을 전공하고
있어요. 둘 다 음악을 하죠. 전 이것도 기뻐요. 애들이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전 ''내가 인생을 잘못
살지는 않았나 보다'' 했거든요. 저한테 영향을 받은 거잖아요.
수많은 앨범에서 세션 맨으로 활약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한 때 색소폰 연주는 거의
수많은 앨범에서 세션 맨으로 활약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한 때 색소폰 연주는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죠. 세션 맨 활동이 자신의 연주세계를 확립하는데 장애가 된다는 이야기도
많은데 과연 본인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앨범으로 한 1,000장 가량 될 거예요. 잃은 것도 있겠지만 얻은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가요앨범이 ''80년대 후반부터 사운드의 질도 개선되고 음악적 질도 상승했다고 보는데요, 저도 그런 부분에 일조했지요. 또한 대중가수 세션을 통해 정통 재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상큼한 사운드를 배운 것도 득이었죠.
앨범으로 한 1,000장 가량 될 거예요. 잃은 것도 있겠지만 얻은 것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가요앨범이 ''80년대 후반부터 사운드의 질도 개선되고 음악적 질도 상승했다고 보는데요, 저도 그런 부분에 일조했지요. 또한 대중가수 세션을 통해 정통 재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상큼한 사운드를 배운 것도 득이었죠.
너무 재즈적이면 안 되고, 어떻게 해야 대중들이 좋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 겁니다.
이정식을 압축하는 키워드는 대중성이다.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겸비한 몇 안 되는 재즈연주자''로 평가 받는다. 이것은 그가 치열한 음악고민을 통해 실력을 갖춘 동시에 재즈 연주자들이 누리지 못한
이정식을 압축하는 키워드는 대중성이다.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겸비한 몇 안 되는 재즈연주자''로 평가 받는다. 이것은 그가 치열한 음악고민을 통해 실력을 갖춘 동시에 재즈 연주자들이 누리지 못한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는 뜻이며 나아가 정통재즈에만 사고가 머물러있는 국내재즈를 바깥으로, 다수대중으로 향하게 만들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그는 ''92년 미국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인 블루 노트에서 국내 뮤지션으로는 처음으로 연주했으며
그는 ''92년 미국 뉴욕의 유명 재즈 클럽인 블루 노트에서 국내 뮤지션으로는 처음으로 연주했으며
''97년에는 론 카터(Ron Carter)와 녹음 작업하고 함께 무대에 서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그 실력은 미국과 일본 재즈 신에서도 찬사를 받을 정도. 그런데 그는 대중가수의 앨범 세션 참여는 물론
TV 출연과 라디오 프로 DJ 등 대중매체와도, 즉 대중적 활동과도 친화적이다. 그는 ''재즈는 대중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철학을 자신의 혈관에 저장해놓고 있다.
이정식씨의 연주와 활동반경이 너무 대중적이라는 비판도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든 ''전 대중적으로 한다!''는 것을 아주 오래 전부터 제 마음 속에 정착시켜왔습니다.
이정식씨의 연주와 활동반경이 너무 대중적이라는 비판도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든 ''전 대중적으로 한다!''는 것을 아주 오래 전부터 제 마음 속에 정착시켜왔습니다.
정말 재즈스러우면서도 대중들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왔다는 거죠. 전 임프로바이제이션(즉흥)을 하나
하더라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순간 번뜩이는 것을 활용합니다. 대중에게 다가가는 이런 것은 사실 ''밑바닥''에서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젊은 연주자들은 이런 점이 부족하죠.
''90년대 중반 국내에 재즈열풍이 불던 시점에 지상파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한 것도 대중적 접목의 일환으로 봅니다. ''95년 SBS TV 깊은 밤 전영호 쇼,
''90년대 중반 국내에 재즈열풍이 불던 시점에 지상파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한 것도 대중적 접목의 일환으로 봅니다. ''95년 SBS TV 깊은 밤 전영호 쇼,
이듬해 KBS 2TV 밤과 음악사이였죠. 그런 활동은 어떻게 평가하는지.
정말 아쉬운 대목이죠. 제가 너무 어렸는지 제대로 판단을 못했어요. 굉장히 좋은 찬스, 막 붐이 일어난
정말 아쉬운 대목이죠. 제가 너무 어렸는지 제대로 판단을 못했어요. 굉장히 좋은 찬스, 막 붐이 일어난
재즈를 알리고 멋지게 뿌리내릴 수 있는 계기였는데 잘 활용하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만약에 그런
재즈 붐이 다시 온다면 잘할 수 있을 텐데...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은 재즈의 인프라가 부족해서
겠죠. 개인적으로는 알려졌지만 재즈는 알리는 못했어요. 제가 거기까지 밖에 생각을 못한 겁니다.
젊은 연주자들이나 후배들에게 하는 충고가 있다면.
우리의 색깔, 나만의 색깔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권고하죠. 자기 것을 찾지 않고 외국
젊은 연주자들이나 후배들에게 하는 충고가 있다면.
우리의 색깔, 나만의 색깔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권고하죠. 자기 것을 찾지 않고 외국
아티스트의 사운드 자체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 영락없는 그 사운드가 되고 맙니다. 또 최근에는 빈티지
열풍이 불어 그 시절의 것을 찾는 게 유행인데요, 그럴 때도 ''너의 소리를 찾아라!''고 주문해요. 저도 한때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을 신(神)처럼 숭배하면서 벽에다 사진을 붙여놓고 열심히 따라 했어요.
더블 톤, 트리플 톤, 순환 호흡법 등등... 사실 그런 연주를 하면 외국에선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개성이
없잖아요. 그러면서 내가 할 것은 따로 있구나 하고 절감했습니다.
''61년에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도시 물을 전혀 먹지 못한 말 그대로 ''촌놈''이었던 그는 함평농업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 때 재즈를 하겠다는 일념 하에 색소폰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서울로
''61년에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도시 물을 전혀 먹지 못한 말 그대로 ''촌놈''이었던 그는 함평농업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 때 재즈를 하겠다는 일념 하에 색소폰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광고를 보고 봉천동의 살롱에서 일하고, 나중 유랑극단을 조직해 순회하는 등 그의 처절한
산전수전을 들으면 그가 도저히 해외 유학파가 될 수 없었음을 알게 된다. "생계와 자식 부양으로 해외로 유학을 가는 것은 전혀 엄두를 낼 수 없었어요." 그는 색소폰을 거의 독학으로 마스터했다.
''82년 김강섭 악단에 입단하고, 이듬해 이판근씨에게 사사 받고, ''85년 신관웅 재즈 쿼텟에
''82년 김강섭 악단에 입단하고, 이듬해 이판근씨에게 사사 받고, ''85년 신관웅 재즈 쿼텟에
참가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면적을 확보한 그는 상기한 앨범 세션활동, 올림픽 축제 한국 재즈 페스티벌 참여, ''89년 한일 문화교류 ''재즈트레인'' 공연 등 내외의 전방위 숨가쁜 활동으로 마침내 ''스타''
색소폰 주자로 올라섰다. 독집 앨범도 ''92년 ''밤으로 간 기차''와 ''모차르트도 재즈를 좋아할까?''와
같은 곡이 수록된 Love Sax를 위시해서 지금까지 여덟 장을 냈다.
고향이 전남 함평입니다. 시골이고, 전혀 재즈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텐데
고향이 전남 함평입니다. 시골이고, 전혀 재즈문화를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텐데
어떻게 열 네 살 어린 나이에 색소폰을 불게 된 거죠?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장 먼저 축음기가 들어온 집이었어요.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셨고, 줄곧 미군부대에서 음반을 가져다 들으셨습니다. 그러면 전 피리나 하모니카로 음악을 따라 연주하곤 했는데 함평중학교에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장 먼저 축음기가 들어온 집이었어요. 아버지가 직업 군인이셨고, 줄곧 미군부대에서 음반을 가져다 들으셨습니다. 그러면 전 피리나 하모니카로 음악을 따라 연주하곤 했는데 함평중학교에
입학하니 밴드부가 있더라구요. 전혀 있을만한 곳이 아닌데, 한국전쟁 때 미군 군악대가 쓰던 악기를
학교에 주고 간 바람에 밴드부가 생겨난 거죠. 고2 때 수학여행을 포기하고 그 돈으로 광주에 나가
색소폰을 샀어요. 그게 도회지로 처음 나간 거예요. 서울은 졸업반 때 무작정 올라온 거고, 숙식 해결해
준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전화해 봉천동 살롱에서 첫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이정식 음악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화두가 국악과의 협연입니다. 왜 국악과 만나야겠다고
이정식 음악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화두가 국악과의 협연입니다. 왜 국악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 궁금합니다.
외국 연주를 많이 하면서 우리 소리, 내 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어요. 국악과 섞으면 외국에서는 신선하고 우리의 것을 담기에도 충분해 만나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연주하면
외국 연주를 많이 하면서 우리 소리, 내 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어요. 국악과 섞으면 외국에서는 신선하고 우리의 것을 담기에도 충분해 만나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가 연주하면
그게 한국 재즈다!''라는 쪽으로요. 내가 이미 한국 사람이니까 외국 연주자와 확실히 다르지 않겠어요?
굳이 국악과 접목하는 방법만이 아니라도 내 정체성을 가지고 재즈를 연주하면 그게 한국 재즈라는 거죠. 많은 젊은 연주자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는 덧붙여 "어떤 때 젊은 사람들을 보면 상식을 가리지 않고 음악을 해요. 그런데 굉장히 세련되게
그는 덧붙여 "어떤 때 젊은 사람들을 보면 상식을 가리지 않고 음악을 해요. 그런데 굉장히 세련되게
또 감성적으로 만들어요. 대단한 거죠.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예술적인 부분에 뛰어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신세대 뮤지션과 우리 음악의 글로벌화 가능성을 신뢰한다고 했다.
그는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로, ''내가 연주하고 나서 그의 연주를 들으니 한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로, ''내가 연주하고 나서 그의 연주를 들으니 한방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일본의 트럼펫 연주자 히노 테루마사, 다음으로 미국의 테너 색소폰주자 마이클 브레커(Michael Brecker)를 꼽았다. 하지만 말미엔 이 날 인터뷰의 거의 주제나 같은 주장을 또다시 반복했다. "하지만 이 사람(마이클 브레커)과 똑같이 하면 안 되니까 응용해서 내 것을 만들고 내 세계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52street 2005년 10월호 임진모
52street 2005년 10월호 임진모